진주만 공격의 지휘자이자 일등공신인 야마모토 이소로쿠 해군대장 그는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진주만 공습에 관한 최신 연구결과를 포함하여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진주만 공습의 여러 측면들을 보여준다. 1941년 12월 7일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결정적인 하루였다. 이날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중립을 유지하고 있던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인 날이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전쟁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공습 후에 선전포고가 이루어졌다는 도덕적인 문제는 차치하고 역사상 이와 같이 엄청난 성공을 거둔 기습작전은 다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작전의 전개과정은 당대의 전략을 초월했다.
하지만 진주만 공습의 의의는 단지 군사적인 것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역사적 의미를 담는다. 1941년 12월 7일에 있었던 일본의 진주만 기습은 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제대로 구분이 되지 않던 혼돈의 시대를 마감하고 확실하게 양편으로 나누어 무한대결을 벌이도록 규정지었다.
정치적 배경
양측 지휘관
해군대장 허즈번드 E. 킴멜 | 육군소장 월터 C. 쇼트 소장 | 해군대장 해럴드 R. 스타크 | 육군대장 조지 C. 마셜 | 코델 헐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대통령 | 해군대장 야마모토 이소로쿠 | 해군중령 후치다 미쓰오 | 해군중령 겐다 미노루 | 해군중장 나구모 주이치 | 노무라 기치사부로 대사
미국 태평양함대
쇼트 장군은 일본 제5열의 활동만을 걱정했으며, 결국 그는 모든 육군 항공기들을 한곳에 집중시켜 경비하기 쉽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렇지만 이런 조치는 결과적으로 항공기들을 공습에 대단히 취약하게 노출시켜버렸다. 쇼트는 탄약 경비를 강화하고 해안포대는 경계태세에 들어가며, 레이더 기지는 07:00시에 작동을 멈추라는 명령을 내렸다. 킴멜 제독은 항공모함을 교대로 출항시켰고 함정과 항공기로 초계활동을 시작했으며, 선박들은 잠수함에 의한 통상파괴전에 대비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항공모함 렉싱턴은 미드웨이 섬에 항공기를 운반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킴멜은 애처롭게도 그 항공기들이 진주만에 더 필요한 존재라고 느끼고 있었다. 비록 경계 태세를 갖추기는 했지만 누구도 일본군이 공습을 해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전함의 함포사격은 가능하다. 제5열의 활동도 있을 수 있고, 어쩌면 육상부대의 침공도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공습이라고? 누구도 그런 가능성에 신뢰를 보내지 않았다.
사실 일본도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을 넘어뜨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태평양의 주도권을 놓고 사사건건 일본의 팽창을 방해하는 미국에게 상징적인 군사행동을 함으로써 일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강화협상을 성사시키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일본은 잠자는 공룡의 꼬리를 밟았던 셈이었고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 세계사에 등장해 극동지역을 제패하며 그나마 이루어놓은 모든 것을 한 번에 잃어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그동안 영광스런 고립주의를 주창하던 미국이 세계로 나가 슈퍼파워로 성장하는 극적인 동기가 되었고 같은 시기 독일의 침략을 받은 소련도 전후에 세계질서를 좌우하는 초강대국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새벽.
일본은 한가하게 진주만에 정박 중이던 미국 태평양함대를 공격한다.
잠자는 거인, 미국을 깨워 전쟁에 끌어들인 이날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결정적인 하루가 된다.
1941년 진주만, 치욕의 날
1941년 12월 7일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결정적인 하루였다. 이날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중립을 유지하고 있던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인 날이다. 6척의 일본 항공모함은 자신의 모든 자원을 동원해 한가하게 진주만에 정박 중이던 미국 태평양함대를 공격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공격을 과감한 전략에 의한 눈부신 기동으로 보기도 하고, 우방이라고 가정했던 나라가 저지른 사상 유례가 없는 악행이자 기만행위로 간주하기도 한다.
역사상 중요한 개별 전투를 다룬 <세계의 전쟁> 시리즈로 사랑받고 있는 플래닛미디어에서 열네 번째로 『진주만 1941-잠자는 거인을 깨우다』를 출간했다. 이 책은 진주만 공습에 관한 최신 연구결과를 포함하여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진주만 공습의 여러 측면들을 보여주며, 운명적인 그날――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이 ‘치욕으로 기억될 날’이라고 선언했던――과 관련해 이제까지 잘못 알려졌던 신화들의 베일을 벗긴다.
잠자는 거인을 깨우다
1941년 12월 7일. 미군 조종사, 조지 웰치 소위와 케네스 테일러 소위는 진주만이 공격당하기 전날 밤새도록 춤추고 포커를 치며 놀았다. 07:51시, 그들은 피로에 찌든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연속적인 기관총 소리와 폭탄이 터지는 둔탁한 소음을 들었다. 밖으로 뛰어나온 두 사람은 저공으로 비행하는 항공기들과 그들의 날개에 새겨 있는 붉은 일장기를 보았다.
하와이는 근무조건이 좋은 곳이었다. 하와이는 아메리카 대륙의 서쪽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육지로 일본과 미국 사이에 위치한 이 섬은 처음에는 해군의 수상함 공격부대를 위해, 이후에는 항공부대를 위해 완벽한 기지를 제공했으며, 진주만은 미국 태평양함대의 모항이었다. 그리고 이날 이전까지 하와이는, 전시가 아닐 때 대부분의 군부대의 일상이 그렇듯이 어느 정도 지루한 근무지에 속했다. 그러나 아시아로의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던 일본은 태평양함대의 모항인 하와이를 자국의 영토 확장에 잠재적 위협이 되는 존재로 간주하고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하와이를 주시했다. 전쟁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지만 진주만의 삶은 여느 때와 같이 진행됐다. 진주만은 태평양의 가장 강력한 기지였고, 미국 본토에서 동양으로 가는 첫 번째 기착지였다. 대포가 하와이 해안을 둘러쌌고, 비록 일부는 구식 비행기였지만 B―17 폭격기 12대가 오아후 섬의 전력을 보강해주었다. 그 누구도 진주만이 공격받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12월 7일 새벽, 갑자기 들이닥친 두 차례에 걸친 일본의 공습은 미국 함대를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서 짓밟았다.
Attack on Pearl Harbor 진주만 공격 태평양 전쟁
PEARL HARBOR SOUNDTRACK 영화 " 진주만 " 사운드트랙 中 Hans Zimmer - Tennessee